그날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익숙한 장애물을 찾고 있던
나의 감각이, 딱딱한 소스라침 속에서
최초로 만난 事象, 불현듯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나의 플래쉬 속으로 갑자기, 흰

- 기형도, <나의 플래쉬 속으로 들어온 개> 中

*  事象 :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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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다가 불현듯 내 생각이 났다.
술을 엄청 퍼 마시고 비틀거리다 우리학교 교양관의 까칠까칠한 벽에 부딪혔다.
벽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신 나로서는...
그 때 나는 허연 빛을 보았다. 불이 번쩍 했다.

그래서 나는 기형도 시인이 술을 한 잔 하고 비틀거리다
술집 근처 벽에 머리를 한 번 헤딩하고 나서 시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한다
플래쉬, 흰 빛이 번쩍~~
그렇게 부딪히고 나서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아프지만 뭔가 속 시원한 마음이 있었다. 그때는...

이제는 술을 마셔도
안경을 잃어버리고, 몸이 피곤해 죽을 것 같아도
뭔가 마음이 허전하다.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다.
by 누런돼지 2008. 3. 26.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