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일관적이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죠. 일반론을 빨리 갖고 싶어하고, 한 번 그 일반론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걸로 가고 싶어하죠. 그러다보니 그런 일반론에 맞지 않는 사례를 만나면 쓸 데 없이 너무 많이 고통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받아들인 통념이나 이미지가 괜히 삶을 힘들게 하는 듯 합니다. 따져 보면 삶에 주어진 것이 적지 않은데 그걸 즐기지 못하고 힘들어 하죠.”

- 이동진 기자의 홍상수 인터뷰 중

by 누런돼지 2008. 4. 30. 11:08

“내 나이에 맞는 영화 찍고 싶었다”

이준익(47) 감독이 또 ‘업’됐다. <왕의 남자>가 1200만명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흥행 1위로 올라선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뒤에 만든 <라디오 스타>(28일 개봉)가 지난 7일부터 시사회를 열기 시작한 이후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7일 이 감독을 만났을 때도, 그는 영화 본 지인들로부터 오는 찬사의 문자 메세지를 열어보느라 바빴다.

한물 간 가수(박중훈)와 그의 매니저(안성기) 사이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이다. 처음 구상은 다르지 않았나.
=처음엔 좌천된 여자 프로듀서와 떠밀려난 왕년의 가수왕이 영월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나 생기는 로맨스가 중심 축이었다. 거기에 매니저 기능이 좀 있고, 영월 방송국의 소시민적인 직원과 주민들 이야기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런 로맨스가 지금 사람들에게 먹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게 내 나이의 감독이 할 만한 이야기인가 회의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매니저와 가수로 중심축을 이동시켰다. 굳이 매니저와 록 가수의 얘기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먼 길을 오래 같이 걸어온 동반자의 이야기. 이게 뭔가 삶을 더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듯했다.

이야기는 단순한데, 뜻밖에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는 품이 넓고 깊다.
=성공 뒤에 온 실패의 지난함 같은 건 현대인의 일상에서 상존하는 감정이 아닌가. 특히 70~80년대 학번 세대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감정일 것같다.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한 시기의 현상일 뿐이다. 성공하면 반드시 행복한가. 그러면 실패하면 불행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최선을 다했던 모습 안에는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만 남아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건 대다수 현대인을 위한 위로가 된다. 관객이 웃고 우는 게 과도한 경쟁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고단함에 기인한 거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고단해. 빨리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입시 끝나면 달라지나. 사회에서 더 긴 터널 안에서 뜀박질해야 하고. 과당경쟁 시스템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고단함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것 아닐까.

영화가 특별히 강한 갈등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영화의 중심이 인물들의 내적 갈등이다. 한물간 가수가 자존심은 남아서 주먹질하고, 매니저는 뒷수습하면서 돈 빌리러 다니고.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영월로 가고. 둘 다 지독한 루저들이다. 그런데 영월이라는 변방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도시에서 가졌던 출세, 성공 같은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해제된다. 그 순간에 다시 사회적 욕망이 손을 내민다. 음반업자가 음반 취입하자고 한다. 얼싸하고 달려가보니 업자가 매니저더러 당신은 빠지라고 한다. 매니저는 더 큰 박탈감을 안고서 가수와 정 떼기를 하려 하고…. 이런 유혹과 둘 관계의 균열이 외적 갈등이지만, 관객들은 둘의 이미 내적 갈등을 알고 있다. 원래 외적갈등과 내적갈등이 동일한 크기로 전달되면 영화가 무척 평면적이 된다고. 이 영화에서 외적 갈등에 기인한 긴장은 그리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던 거다. 그 바닥의 내적 갈등을 관객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그러다보면 어디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끝에 가면 가장 존경할 만한 우정을 간직한 인간들임이 드러나는 거지. 왜 글에도 텍스트가 있고 컨텍스트가 있잖아. 시에는 활자와 행간이 있고. 내적 갈등이 컨텍스트이고 행간인데 이 영화의 텍스트, 외적 갈등은 너무 통속적이잖아. 그런데도 관객이 반응한다는 건 컨텍스트에 대한 공감이 있다는 말 아닐까. 이 영화와 유사한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나. 어떤 장르에 쉽게 귀속되지 않는 영화 아닌가. 나는 영화에서 영화를 따오지 않고 세상에서 영화를 가져오려 한다. 영화는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는 게 내 지론이고.

영화의 울림이 큰 건 내적 갈등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인가.
=내적 갈등이 깊으니까 외적 갈등은 간단하게 가도 된다는 거지. 내 영화가 늘 그렇지만 이 영화도 비주류, 마이너리티, 아웃사이더들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식에 관한 거고.

에피소드도 단순하다.
=이 영화는 관계에 대한 영화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고단하게 삶을 지탱하면서 함께 해온 관계. 그런데 에피소드가 관계를 깨면 안 된다. 에피소드는 스케치에 그쳐야 한다. 영화의 감흥이 우연히 얻어진 것처럼 보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걸 다 정확히 의도하고 한 거라고.

이 영화에선 영월 여관의 한 방에 가수와 매니저 둘이 자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도 그렇게 죽치면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어느 때부터 그러지 않고 멀어지면서 서로들 사회에서 뭔가가 돼간 건데 그 뒤로 각자 좁아지고 비굴해지고 뭔가를 잃어간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직도 함께 죽치는 이 둘의 모습이 울림을 주는 것같다. 과거에 우리도 그랬지 하는 향수가 아니라, 지금 순간에도 저렇게 죽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게 소중해 보인다고 할까.
=그게 아웃사이더의 미학 아닐까. 사회조직에 들어가면 다 서열화된다. 어쩔 수 없이 비겁해지는 게 있다. 반면 아웃사이더들은 비겁해질 건덕지가 없다. 그런데 조직에 들어간 이들은 또 다 행복한가. 자기 상황을 객관화시켜서 보면 누구나 아웃사이더 아닐까. 그건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본주의 사회의 서열화, 계급화 안에선 누구나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국내 감독 중에 내가 나이로 랭킹 안에 들어가는데 내 나이에 맞는 영화가 뭘까. 이제 밀려난 70~80 세대의 마음을 알아주는 영화. 그걸 찍는 게 맞지 않을까. 또 그런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본다면 그건 세대간의 단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거다. 이 영화는 한국 대중 음악의 삼대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일부러 한국 록의 1세대인 신중현의 노래를 세곡이나 넣었다. 그리고 주인공 최곤은 2세대에 해당하고, 영월 시골 밴드로 나오는 노브레인은 3대인 것이고. 한국 팝의 연대성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곡도 배치하고, 멘트도 넣은 거다. 나는 영화의 미학적 기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추구한다. 영화가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즉 정화해야 할 사회의 페이소스(고통)가 뭐냐를 찾는 거고. 미학적 기능을 추구할 의지는 아예 없다. 지식이 감동을 주는 걸 봤는가. 감동을 주는 건 행동이다. 행동주의자가 없으면 지식인들은 밥 굶는다. 지식인은 행동주의자를 기술하면서 먹고 산다.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해본 적이 없다. 학력도 떨어지고. 아이큐도 97이다. 예비고사는 (340점 만점에) 160점 맞았고.

영화 안에서 노브레인을 일석 삼조로 쓰고 있는 것같다. 음악 필요할 때 음악 해주고, 코미디 필요할 때 코미디 해주고, 대사 필요할 때 대사 쳐주고.
=노브레인은 일상이 그래. 걔네들 그렇게 살아. 연기가 아니다. 그건 다큐멘타리야. 그들을 넣은 게 이 영화가 20대에 호소할 게 없어서이다. 30~40대는 노브레인 모른다. 10~20대는 안성기, 박중훈을 모르고. 다리를 놓자는 거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현재와 손잡을 여지가 없었다. 현재성이 없어. 정서나 배우로 치면 <라디오 스타>가 훨씬 올드한 영화인데 여기엔 김추자부터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까지, 노래로 과거와 현재 30년을 통으로 묶잖아. 그래서 현재 관객에게도 소구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

처음 구상처럼 멜로의 틀 안에서도 긴 세월을 함께 해온 관계를 다룰 수 있지 않나.
=그렇지. 지금 이 영화에서도 두 명 중 하나, 예컨대 가수를 여자로 바꾸면 진한 멜로가 되는 것 아닌가.

만약 여자 가수와 남자 매니저가, 남녀의 애정이 아닌 동료애로 20년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면 얘기가 먹힐까.
=먹힐 걸. 난 사랑을 안 믿어. 그걸 우정으로 채우는 거고. 난 마음을 안 믿어. 한자로 마음 ‘심(心)’자는 획의 방향이 다 달라. 지리멸렬이야. 그건 마음은 변한다는 거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오래 못 간다. 뜻이 같은 사람은 오래 가지. 그게 동지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한다. ‘마음을 믿는 건 지조가 없는 거다.’ 난 내 마음이 변하는 걸 알기 때문에 남의 마음이 안 변할 거라고 믿질 않아. 내 마음 변하는 건 용서하면서 상대방 마음 변하는 건 용서 못하는 건 무례한 인간이야.

다음 영화는 멜로 한다고 했는데, 마음을 안 믿는 사람이 멜로 찍어도 되나.
=제목이 <매혹>이고 정진영하고 하려고 하는데, 한번 가 볼라고. 호기심이 강해서. <왕의 남자> 때 다음 영화를 묻길래 <왕의 남자>에서 가장 멀리 간 영화를 할 거라고 했는데, 이 영화가 그렇지 않아?

정진영, 박중훈 등 배우는 계속 같이 가는데, 새 배우에 대한 호기심은 없나.
=새로운 길을 가는데 꼭 잘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가야 하나. 잘 아는 사람 하고 안 가본 길을 가는 게 새로운 거 아닌가. 새 사람하고 하려면 그동안 걸어온 길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같이 해온 사람은 잘 아니까. 새 사람이 어떤 길을 자꾸 가보자고 하는데 나는 이미 가 본 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나.

이번 영화는 경쟁 사회에서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데, 당신이 출연한 광고는 증권회사 광고였다. ‘당신은 성공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당신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매우 성공 지향적이고 경쟁 중심적 광고다.
=광고 출연은 영화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거다. 안 해본 걸 해본다는 차원이고. 씨에프 모델이 되면 어떨까, 알고 싶기도 하고. 물론 돈도 되고. 여러 광고 중에 증권 광고를 택한 건 그래도 상대적으로나마 그게 산업자본에 보탬이 된다고 보니까. 만약 아파트 광고 같으면 하지 말아야지. 부동산투기를 가속화시키는 건데.

<왕의 남자> 성공으로 빚은 다 갚았나.
=40억원 빚 완전히 다 갚았다. 그런데 세금 낼 돈이 떨어져서 다시 빚져야 될 판이다. 이번 영화 잘 되면 세금 내는 거고. 난 아직도 ‘빚테크’ 하고 있다. 평생에 재테크 해본 적이 없다.

흥행 1위 감독으로 최정상에 올라보니 어떤가.
=남들이 나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보는 눈이 안 바뀌었다. 남이 나를 보는 눈이 진짜라고 하는데 과연 그게 진짜일까? 그것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돈과 명예가 한꺼번에 들어온 케이스인데, 실제 내 일상은 바뀐 게 없다. <왕의 남자> 종영일 다음날 <라디오 스타> 크랭크인했고. <왕의 남자> 토론토영화제 초청됐는데, 이 영화 개봉 때문에 거기도 못 가고.

글 : 임범 (<한겨레>기자)
by 누런돼지 2007. 10. 8. 10:42

<즐거운 인생> 이준익 감독

영화사 아침에 있는 이준익 감독의 사무실에서 “막 한강을 건넜다”는 그를 기다리면서, 그날 하루만도 인터뷰가 다섯개나 잡혀 있던 그와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깨달은 사소한 사실 몇 가지. 사무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리 많지 않은 책들 중에 <우리말 상소리 사전>이라는 제목이 유독 튀더라는 것. 나이치곤 날씬한 몸매를 지닌 그는 매끈한 던힐 슬림 담배를 피운다는 것. 사진기자가 시키는 대로 선선히 포즈를 취하는 그는 자신이 ‘포토제닉’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 “말이 되는 걸 말이 안 되게 만드는 감독이 있어. 반면 말이 안 되는 걸 가지고 말이 되게 만드는 감독도 있지. 나는 후자야”라고 자신있게 토로하는 이준익 감독이야 가느다란 힌트 하나로 그럴싸한 이야기 몇개는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거칠게 추측건대, 그는 언변이 끝내주고 멋을 알며 자신이 매력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고개 숙인 40대 남자와는 거리가 먼 듯한 이준익 감독이 또래 남자들이 등장하는 영화 <즐거운 인생>을 추석 선물로 들고 왔다. 전작에서 주목했던 인물들을 떠올리면 일관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삶에 찌든 남자들이 20대에 품었던 음악의 열정을 되살린다는, 이준익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말이 안 되는 영화”란다. 게다가 개봉 준비하랴, 취재 응하랴 정신없을 것 같은 그가 벌써 차기작 <님은 먼 곳에>를 준비 중이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에 타이 로케이션까지 걸친 만만치 않은 프로젝트다. 그러니 호기심이 일 수밖에. 말이 안 되는 소재를 말이 되게 밀어붙이는, 혹은 몸이 두개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비결은 대체 무얼까. 인터뷰를 좀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대부분이 설득하듯, 가끔씩은 타이르고 협박하듯 열정적으로 답한 이준익 감독의 말투를 고스란히 살리려고 애썼다.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 “울었다”고 했는데 <즐거운 인생>는 어땠는지.
=눈물이 흐르더라고. 뻑뻑해. 끝나고 나니까 이렇게 자국이 생겼데.

-어떤 감상이 들었기에.
=모든 눈물은 자기 설움이에요. 영화를 핑계로 자기 안에 있는 잠재된 서러움이 올라오는 거지. 남의 슬픔이 어떻게 자기 눈물의 이유가 될 수 있겠어?

-배우의 장점을 발굴하고 부각시키는 힘이 있다. <즐거운 인생>에선 장근석이 빛을 발하던데.
=장근석, 김상호가 그랬지.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정(승혜) 대표가 해주는 대로 하지. 우린 다 같이 만들잖아. 상업영화를 어떻게 혼자 만들어. 상업영화는 보편적인 정서를 얼마나 더 쉽게 전달하느냐에 목표를 두고 있어. 예술적인 욕심보다 대중영화의 성실함이나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해.

-네 배우 모두 그렇게 캐스팅했나.
=그럼. 심지어 <타짜>도 안 보고 김윤석을 캐스팅했는걸. 나, 배우들의 전작 잘 안 봐. (<님은 먼 곳에>에 출연할) 수애도 <가족> 하나만 봤어.

-전작에서 마이너리티를 설득력있고 사랑스럽게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삶에 지치고 주눅든 40대 남자들도 비슷한 소재인 것 같은데.
=어, 난 대한민국에 사는 90%가 그렇다고 봐. 마이너리티를 직역하면 소수자라고. 메이저리티가 몇명이라고 봐? 우리나라에서 메이저리티가 몇명일 것 같아, 자기는?

-글쎄. 어떤 사람을 메이저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그치, 메이저리티는 사회적 기준에서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야. 군대에서도 장교를 메이저라고 하지. 그럼 장교가 많아, 사병이 많아? 당연히 사병이 많지. 단어나 용어에 대한 정확성이 굉장히 필요해요. 단어를 오독해서 큰 오류를 범하거든. 그건 진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대한민국에 주류가 몇 %라고 생각해? 많아야 10%야. <씨네21>의 사장이 몇명이야? 간부가 몇명이야? <한겨레> 다 통틀어서 몇 %라고 봐? 10%야. 그 이상이면 성립이 안 돼. 그럼 메이저는 대한민국 5천만명 중에 500만명밖에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럼 4500만명이 남잖아. 거시기, 광대, 한물간 가수, 그가 영월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과 그 주변의 관중, 그거 다 마이너리티 아냐? 그래서 마이너가 휠씬 더 많은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선례로 살면 그 열패감은 어떻게 감당할 거야? 나는 메이저를 숭배 안 해. 메이저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야.

-인터뷰 중에 루저란 단어를 사용하니까 굉장히 싫어하더라.
=루저, 정말 짜증나지. 루저는 개뿔이. 대한민국 인구 중 4500만명이 루저란 말 아니야. 정말 이상해 죽겠어. 그 얘기 들으면 신경질이 나.

-<즐거운 인생>은 “최석환 작가와 3일 동안 방바닥을 뒹굴면서 생각해낸 기획”이라고 들었다.
=<매혹>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는데 투자사에서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한대. 불륜과 패륜이 너무 극단적이라서. 투자를 ‘빠꾸’ 맞았어. 그런데 잡지사가 잡지를 내듯 영화사는 영화를 찍어야 할 거 아니야. 급한 대로 방바닥에 대가리 몇번 팍팍팍 찍고 탁 하나 나온 게 <풀 몬티>랑 <코요테 어글리>를 합쳐보자는 시도였어. <풀 몬티>의 꿀꿀함과 <코요테 어글리>의 신명남, 두 가지가 딱 붙었잖아. 다만 내가 40대니까 40대가 주인공이고. 40대 남자가 20대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면 조작된 거지, 삶의 리얼리티가 있겠어? 그건 20대 감독이 하는 게 낫지. 안 그래요?

-그렇다면 왜 또 음악을 선택했는지.
=나는 음악을 놀이의 한 형태라고 봐. <황산벌>에서 전쟁터를 의도적으로 놀이터처럼 만들었다고. <왕의 남자>의 광대에겐 놀이 자체가 노동이야. <라디오 스타>의 주인공은 한물간 스타라지만 원래 잘나가던 놀이꾼이라고. 이 작품 역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놀이로 밴드를 선택한 거야.

-여성에 대한 시각에 문제가 있다거나 남성적인 판타지를 그린 영화라는 식의 부정적인 평이 보이더라.
=동의해. 대한민국에서 40대 이상의 남자들은 남녀공학을 다니지 못했다고. 남녀칠세부동석으로 살았어. 군대가서 남자들만의 유사가족으로 3년을 보냈다고. 그런 내가 그렇지 않다고 자꾸 우기는 것도 거짓말이야. 지금은 과거의 남성중심 공동체에서 남녀공동체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시점이지. 내 영화도 더 미래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겠지. 여성 관객에 대해 간과한 것을 만회하려고 하는. 그건 내게 결핍이니까. 의도적인 건 아냐. 여자 관객에게 몰매맞을 일 있어? 나는 솔직하게 한 것뿐이야. (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여성 캐릭터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렇지. <황산벌> 이후 한번도 여성들의 삶의 깊이라든지 내면에 대해 잘 그리지 못했어. 그나마 <즐거운 인생>이 분량면에서 진보했어. <황산벌>은 여자가 한신 나오고. <왕의 남자>에선 녹수가 열두신 정도 나오면 땡이고. <라디오 스타>도 PD 하나 달랑. 여기에는 마누라가 하나, 둘, 셋인데다 딸에다가 홍대 젊은 여자들도 나오고.

-정진영이 연기한 기영은 너무 철없는 인물로 비치던데.
=일부러 그런 거야. 40대 친구들은 지나치게 철이 많이 들었어. 어린애들은 중구난방으로 놀잖아. 그럼 어른들이 뭐라고 그래. 이노무새끼, 철 좀 들어라 그러잖아. 철은 이성이야. 애들의 철없음은 감성의 에너지에서 나오는 거야. 그걸 억제해. 가정에서 교육받고 학교가면 선생들이 교육해. 순서 매기고 서열화하고 석차 매겨서. 사회에선 회사 상사한테 철 교육받지. 남자는 군대가서 또 철 교육받아요. 내가 현장에 가지고 다니는 책 표지에 뭐라고 써놓은지 알아? 철들지 말자.

-<터질거야>의 세 버전과 <즐거운 인생>은 방준석 음악감독과 이병훈 음악감독이 만든 걸로 안다.
=그렇지. <터질거야>는 일단 촌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어. 활화산 밴드가 대학생 때 작곡한 거니까 20대 초반에 작곡할 수 있는 음이어야 했고. 굉장히 경쾌하고 반복적인 리듬에 80년대 초반에 있었음직한 박자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 <즐거운 인생>의 전반부는 방준석이 한 거고, 뒷부분은 이병훈이 한 거야.

-어릴 적부터 록을 좋아했고 초등학생 때 애창곡이 CCR의 <프라우드 메리>였다던데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나.
=무지하게 많이 들었지. 지금 이야기해도 자기는 몰라. 너무 많아서.

-기영이 대학 선배와 바둑을 두는 장면에선 평소 사람들과 내기 바둑을 즐겨 둔다는 사실이 떠오르더라.
=그럼. 강우석 감독이랑은 대사도 없어. (바둑판 꺼내는 흉내를 내며) 탁 탁. 만원 내기다. 돈 있어?

-주로 강우석 감독이 이긴다고.
=아니, 이겼다 졌다 하지. 나는 승부욕은 있지만 승리욕은 없어. 걔는 승부욕, 승리욕 다 있어서. 승부욕과 승리욕은 다르지. 권투선수가 링에 올라가는 건 승부욕 아냐? 근데 때리다보면 불쌍하잖아.

-이왕 도전한 거면 이기는 게 좋지 않나.
=매번 이기면 그건 승부가 안 되지. 승부는 승리와 패배가 교차할 때 오는 긴장 같은 거야. 포커를 치든 고스톱을 치든 뒷장을 알고 치면 그게 재밌냐? 고스톱 뒷장이 실력이야? 운이지. 승리는 운이 7, 기술이 3이야. 그래서 내가 운칠기삼이라고 하잖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설정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아 논란이 있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일본영화 <회사 이야기>의 판권을 구매해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일단 그런 원작이 있는지도 몰랐고. 씨네월드에서 찍은 영화 중에 원작이 있는 게 <왕의 남자> 빼고 없어. 일본에 그런 영화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시나리오 쓰고 나서 미스터 칠드런의 <구루미>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이게 비슷한 거야. 일본에 연락해서 우리 시나리오가 비슷하다, 시나리오 감수해서 확인해달라고 보냈어. 감독이 편집본 보고 말해준다 그래서 DVD을 또 보냈지. 영화를 본 그 사람의 답이 “스페셜 땡스 투만 넣어줘”. 동시대에 비슷한 영화가 나오는 경우는 할리우드가 더 많아. 이 시대의 사회적 원트를 찾아내는 게 상업영화 기획의 기본이기 때문에 그래. 이준익이 이런 게 있으니까 빨리 베껴서 해먹자, 그랬을까? (웃음) 그랬다면 진짜 나쁜 놈이지.

-차기작 <님은 먼 곳에>의 촬영이 10월부터 시작된다던데. <즐거운 인생> 개봉이 추석인데 너무 이른 것 아닌가.
=그렇지. 난 약간 마조히스트적인 성향이 있어. 내 나이대 남자들은 다 마조히스트야. 군대에서 유격훈련받을 때 아주 학대를 해요. 그게 자학으로 와. 그래, 알았어, 씨발, 더하는 거야. 자기는 뭔지 모르겠어? 요새 젊은 애들은 그렇게 안 하나봐. 옛날에는 시대가 그랬어. 자학을 안 하면 불안해.

-<님은 먼 곳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찾아 위문공연단에 합류해 베트남행에 오른 여자를 그린 영화라고.
=내가 이상하게 시대물에 대한 애착이 많아. 한국 현대사에서 베트남전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작업도 상당히 의미있고. 우리나라는 휴전 상태라고. 20세기 냉전 이데올로기가 낳은 마지막 전쟁이 실상 한국전이야. 그리고 베트남전이 미국영화의 전유물인 양 알고 있는데 사실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도 거길 갔어. 어렸을 때 우리 동네 큰형들은 다 베트남 갔다왔다고. 암스트롱이 달 가는 모습, 베트남에서 가져온 TV를 아랫집 지붕에 올려놓고 온 동네 사람들이 봤어.

-이례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여필종부의 민족적 정서가 반도 안 빠져나갔을 때야. 지금의 젊은 여자들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의 여자라고. 아주 먼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 어머니 때야. 민족적 봉건주의 사회의 여자를 시작으로 당시 남자들이 가지고 있던 마초적 감수성, 가부장적 본질이 전쟁터에서 다 드러난다고. 남자들의 오만한 자만심에 싸대기를 날리는 여자들의 존엄성에 대한 페미니즘영화라고 봐. (웃음)

-여자 캐릭터가 굳이 남편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가는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아, 씨받으러 가. 생각을 해봐. 수애가 3대 독자 종갓집 막내며느리야. 시아버지는 전쟁 중에 돌아가셨어. 아들이라고 달랑 하나 있는데 군대갔어. 거기선 사고를 쳐가지고 베트남까지 갔어요. 시어머니 입장에선 어떻게 할 것 같아?

-정진영, 엄태웅, 정경호 등이 출연한다고 하던데.
=정 대표가 다 캐스팅했어.

-정진영은 조금 악랄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맡는다고.
=악한의 여린 내면을 우리는 이해해야 해. 얼마나 여리면 악해졌겠어. 누가 나를 괴롭힐 것 같으니까 악하게 구는 거야. 선해 보이고, 매너 좋고, 양복 딱 차려입은 사람들 속으로 얼마나 야비한데. 여자들이 그걸 잘 몰라. 여자한테 실례를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은 참 괜찮은 남자들이야. 내면과 외면이 같으면 그게 인간이겠냐고, 기계지. 자기, 내면하고 외면이 똑같아? (웃음)

-<님은 먼 곳에>는 타이에서 촬영할 예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성사됐나.
=베트남은 영화 찍을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부족해.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미국영화를 거의 타이에서 찍었잖아. 전쟁영화의 특성상 헬기, 군부대 장비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타이는 그런 걸 대여해주는 시스템이 굉장히 좋아. 우리나라 국방부, 절대 안 돼. 아직 전쟁 중이니까. 국방이 우선이지, 영화가 우선이야? 나라를 지켜야지, 무슨 영화를 지켜. 이거 꼭 써줘. (웃음) 타이는 전쟁을 안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헬기도 빌려주고 군인도 빌려주고 총알도 빌려주고 총도 막 쏴주고.

-제작비는 얼마 정도 예상하고 있는지.
=지금 70억원에 맞추려고 기를 쓰고 있지. 전쟁영화를 해외에서 70억원에 맞출 수가 있겠어? 그래도 그렇게 해. 하고 나면 관객은 그러겠지. 아, 그림이 별로라는 둥. 그림은 다 돈이거든. 돈만 줘. 돈이면 다 돼. 나는 돈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만날 그림이 이상한 거야.

-더 좋은 그림에 대한 욕심은 없나.
=그걸 회수할 방법이 있냐. 영화 한편 찍고 은퇴할 거면 막판에 저질러놓고 도망가면 되지. 계속 먹고살아야 하니까 문제지.

-<님은 먼 곳에> 배우들은 열심히 악기를 연습하고 있다고 들었다.
=홍대에서 하고 있어. 열나게 북치고 색소폰 연주하고 있어. 한 열흘됐다.

-수애는 지금 드라마 <9회말 2아웃> 찍고 있지 않나.
=얼굴 한번도 못 봤어. 드라마 끝나면 보겠지, 뭐. 아휴, 훌륭한 배우인데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각자 자기 것만 열심히 하면 돼.

-“재미없으면 딴 거 하겠다”고 했는데 계속 연출을 하고 있다.
=응. 재밌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불안하니까 재미있잖아.

-제작자일 때 못 갚았던 빚을 감독으로 다 갚았으니 불안하다기보다 운이 좋았던 것 아닌가.
=러키하니까 편하게 멈춰서 살리? 누가 그러잖아.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캐나다는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나는 지옥이 좋아. 영화 찍는 게 얼마나 지옥인데. 잘 안 되면 인상 팍팍 쓰고 서로 삐쳐가지고. 속으로 저 새끼, 죽여, 살려.

-잠시 제작사 자리에서 물러난 건가.
=지금은 아침이랑 타이거픽처스잖아.

-씨네월드는 전혀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아구, 회사 20년 해서 빚만 40억원인데. 하고 싶겠어?

-위염을 앓은 걸로 아는데 지금은 괜찮은가.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또 약 먹어야 해. 과식과 음주, 흡연에서 오는 병인데 신물이 막 올라오는 거 있잖아.

-여자는 거짓말을 많이 해서 무섭다고 했다. 오늘 여기자만 두명이 오니 기분이 어떤가.
=여자의 거짓말은 선의야. 선의의 거짓말이야. 근래 그걸 알았어.

글 : 장미
사진 : 오계옥
by 누런돼지 2007. 10. 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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