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
-『붉은 돼지』에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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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단 옆을 무심히 지나가다가 풀숲 사이에서 작은 추모비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그 추모비를 본 순간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그는 특전사 출신이었다. 스포츠형 머리에 항상 손가락이 잘린 장갑을 착용했으며 'Nothing is impossible'이라는 글귀가 수놓인 까만 가방을 메고 다녔다. 적지 않은 나이에 복수전공을 하면서 새로이 우리 과에 들어오게 된 그 형은 어느 누구를 봐도 먼저 인사를 하고 알은 체를 했으며 외모는 딱딱했으나 결코 거친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형을 잘 몰랐지만 축제 때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질서를 유지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점호를 기다리던 나는 TV 뉴스에서 갑자기 익숙한 그 형의 얼굴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학교 앞에서 소매치기를 하고 달아나던 도둑을 붙잡으려고 차도에 뛰어들다가 그만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는 보도였다. 순간적으로 코끝이 찡했다.

“좋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

영화 속 돼지는 수화기 너머의 지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그 대사를 보고 나서 한 동안 뭉클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돼지의 동료들은 젊은 나이에 국기를 달고 날다가 하나둘 씩 죽어 간다. 그들의 죽음이 서글픈 것은 국가에 이용당했다는 사실보다 젊고 순수했던 나이에 죽어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돼지는 그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살아남아 돼지의 형상을 하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자신이나 결국 국가를 스폰서로 택해 날아다니는 것을 택한 그의 친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함’인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뭔지 모를 숙연함을 낳는다. 돼지의 친구들뿐만 아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외치며 죽어간 나이도 고작 23살이다. 그 형도 고작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 적어도 ‘붉은 돼지’ 속에서 표현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돼지는 절대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고성능 무기를 사라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엔진만을 겨냥한다.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답게 돈만을 요구한다. 도적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도적답지 않게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그리고 두 여주인공인 지나의 노래 한 곡에, 피오의 말 한 마디에 어린아이처럼 순해진다. 천추의 한을 품었을 법한 돼지에 대해서도 그의 비행기를 부수거나 할 의도를 지녔을 뿐, 그를 죽이거나 해하려 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보통 그렇다. 도저히 용서 못할 악한은 나오지 않는다. 장르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그의 애니메이션은 그가 보내는 메시지만큼이나 평화주의를 지향한다. 밉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주 착하게 살면 손해 볼 것 같고, 아주 못되게 살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그 느낌. 그들의 ‘착함’이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소시민적이다. 무언가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도덕을 지킨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나름대로 삶의 풍파를 헤쳐 왔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만 억울한 것일까? 그들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나쁜 사람’들은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돼지의 냉소적인 행동에도 알 수 있듯이 그 ‘좋은 사람’들의 죽음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 순수하고 젊은 사람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지나는 비록 공적(空敵, 하늘을 나는 해적)이라 할지라도 친절하게 대하며 싸우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다. 누구도 두 명의 사내를 어이없이 잃어야 했던 지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찍 죽은 ‘좋은 사람’들에 대해 지울 수 없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풀숲에서 그 형의 추모비를 보고 내가 잠시나마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도 그런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들의 죽음은 단순히 이 세상으로부터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세상의 법칙과 고귀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더 이상 헛된 죽음이 나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심어 준다.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말이다. 이것이 ‘나쁜 사람’들을 그나마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도 가끔씩 학교 정문 앞 도로를 지날 때면 그 형 생각이 난다. 그리고 다짐한다. ‘형만큼 좋은 사람은 못 되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쁜 사람을 되지 않을게요.’ 라고.

by 누런돼지 2007. 10. 17. 03:35